내일이면 음력으로 "정월대보름"이네요. 쉽게 말하면 정월달의 대보름, 즉 보름이라면 달이 가장 큰 날인데 정월(1월)이라 하여 일년중에서 가장 달이 밝은 날을 말하는 겁니다. 예전의 농경이 중심이던 시기에는 한해의 풍요를 기원할 만큼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정월대보름 아침 일찍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불렀습니다. 엉겁결에 "왜?"하고 대답을 했는데 그 친구는 "내 더위 사!"라는 말을 했습니다. 친구보다는 먼저 "내 더위 사!"를 외쳤어야 하는 건데. 다른 친구들에게 더위를 팔려고 해도 이미 친구들은 정월대보름인 것을 알고 제 데위를 팔려고 부르는 것에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시골에서 자란 저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네 형들이랑 논에서
쥐불놀이를 하면서 논에 펼쳐진 볏짚(벼를 추수하고 남은 것)을 태우거나 논둑에 불을 놓아서 한 해의 풍년을 바라기도 했습니다. 아마 논둑이나 볏집을 태우는 것은 겨울내에 논둑이나 볏집에서 겨울을 보내는 병충해를 태우는 효과도 있었을 겁니다.
정월대보름에 먹는 음식이 많은데 도시나 시골을 가리지 않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오곡밥과 나물입니다.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다섯 가지 곡식을 넣고 지은 밥을 말하는데, 지방에 따라 오곡의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보통 그 해에 농사지을 곡식들을 넣고 만들면서 풍년을 빕니다. 세 집 이상의 것을 먹어야 그 해 운이 좋다고 해서 집집마다
오곡밥을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나물들도 9종류의 나물을 준비해서 먹었는데 그것을 먹음으로 인해서 여름철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정월대보름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둔 밤, 호두, 은행, 땅콩 등을 주면서
부럼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금니로 깨문 다음에 던지면서 "부럼이요!"라고 하면 그 해에는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풍습이 있습니다.
안동지역에서는 "차전놀이"라고 하여 옛날에 고을민들이 동서로 나뉘어서 동채위의 대장의 지휘에 따라 전진과 후퇴를 하면서 상대편의 동채를 땅에 닿게 하면 이기는 놀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 검색한 내용을 인용구에 넣었습니다.
차전놀이: 차전놀이는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차전놀이는 1937년까지 연중행사로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낮에 강변 백사장이나 벌판에서 거행되다가 일제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8·15광복 후 1958년 건국 10주년 기념행사로서 공보부가 전국 민속예술 제전을 개최하면서 다시 부활하였고, 1966년에는 안동농업중고교 학생이 본격적 차전놀이를 연출하였다. 1969년에는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급회'가 설립되고 이 해에 안동 차전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면서 차전놀이의 대표격이 되었다.
안동차전놀이의 유래는 통일신라 말에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자웅을 겨루고자 안동으로 진격해왔을 때 이곳 사람들은 견훤을 낙동강 물속에 밀어 넣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팔장을 낀 채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내는 차전놀이가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 이 고을 사람인 권행이 짐수레와 같은 수레 여러 개를 만들어 타고 이를 격파한 데서 비롯한 놀이라고도 한다.
먼저 부정을 타지 않게 정성껏 베어 온 길이 20∼30척의 참나무를 X자 모양으로 묶어 동채를 만들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다음, 가운데에 판자를 얹고 위에 방석을 깔아 동여맨다. 동채 머리에는 고삐를 매어 대장이 잡고 지휘할 수 있게 하고 판자 뒤에는 나무를 X자 모양으로 하여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 동채꾼은 대장·머리꾼·동채꾼·놀이꾼으로 이루어지며 대체로 25~40세의 남자 500여 명이 동서로 갈리어 승부를 겨룬다. 동부의 대장을 부사, 서부의 대장을 영장이라고 하며 승부는 상대편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으면 이긴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달맞이"입니다. 정월대보름의 달을 보면서 소원도 빌고 한해 농사를 점치는 세시풍습이 "달맞이"입니다. 즉, 달이 높고 낮음, 크고 작음, 밝고 어둠에 따라 한해 농사가 어떤지 점쳐보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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