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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출신자가 바라는 것

혼자만의 잡담

by 곰탱이루인 2007. 10. 6.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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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을 수석 입학·졸업한 여학생이 서울대 의대에 편입한 사실이 알려져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 만일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졸업한 여학생이 법조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그처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한 대학 졸업생의 선택이 과도한 주목을 끈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병폐로 지적되어온 ‘이공계 기피현상’과 ‘의대 진학 열풍’을 상징하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이공계 출신 고급 인력의 ‘의대 진학 열풍’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난해 카이스트에서는 생물학과 수석 졸업생이 의대에 편입하지 않고 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대학 입시 과열을 분산시키려고 정부가 의학계에서조차 반대한 의학전문대학원제도를 밀어붙였을 때부터 예견된 일입니다. 하지만 정책 실패와는 별개로 이공계 출신 고급 인력이 의학계나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지탄받을 일인지는 따져볼 문제입니다.

우수 인력이 의학계에‘만’ 몰리는 것은 문제지만, 우수 인력의 의학계 진출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의학도 엄연한 과학일 뿐더러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에 더 큰 전문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생명과학도에게 의대 진학은 진행해오던 연구를 발전시킬 수도, 여차하면 개업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는 ‘꽃놀이패’일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처우 차이가 있는 현실에서 이공계 출신을 개인의 사명감에 호소해 연구실에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연구직에만 종사해야 이공계가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공계 홀대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인 중국의 예를 들곤 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 중 이공계 출신의 비율은 20%에 불과하고, 이공계 출신 국회의원 비율도 OECD 국가 중 꼴찌입니다. 이공계 출신 고급 인력을 연구실에만 묶어둔 채 이러한 불균형이 저절로 해결되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이공계에 대한 ‘배반’ 정도로 취급한다면, 설령 그가 고위직으로 진출하더라도 이공계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공계 고급 인력에게는 이공계 출신만 가질 수 있는 전문성과 발랄한 상상력이 있습니다. 융합이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과학기술 영역 외에도 경영, 법, 행정, 문화, 예술 등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서 이공계 전문 지식을 갖춘 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공계 고급 인력이 다른 분야로 활발히 진출하면 이공계의 수준은 물론 사회 전 분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기술입국’이라는 애국심에 호소해 이공계 고급 인력을 연구실에 묶어두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천재 한 사람이 수십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구호로 연구실을 떠나는 이공계 고급 인력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싫다고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거나 질타할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의 사기를 북돋워줘야 합니다.

과학기술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경제를 이만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기술은 국가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공계 기피’니 ‘의대 진학 열풍’이니 하는 말이 무색하게 오늘도 젊은 과학자들은 밤을 지새우며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공계 출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풍족한 물질적 혜택이 아니라 기본적인 처우와 연구 환경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 안 되니까 과학을 사랑하는 인재조차 이공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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