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시절> 이라는 제목은 두보의 시인 <春夜喜雨>에서 따온 구절이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좋은 비는 내릴 때를 알아 만물을 소성시킨다는 내용과 영화는 한 점의 생경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 녹아든다. 한 때 사랑했던 연인은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좋은 비가 내리는 만남을 통해 서로를 소성시킨다. 왜 굳이 청두(成都) 인가, 라는 영화를 보기 전 질문은, 영화를 보고 나면 이들의 사랑의 배경은 결국 청두여야만 했구나, 하는 짧은 탄식과 감탄으로 답변된다.영화의 시작, 청두로 향하는 기내의 시차 안내방송에 따라 동하(정우성)는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린다.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들은 똑같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영화 제목이 올라가기 전 한 시간 뒤로 시계를 돌리는 그 작업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가 우연히 들린 청두의 두보초당에서, 그는 기억 속에 아련하던 옛 사랑을 만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청두의 오월은 스스로 반짝이며 빛을 낸다. 특히 두보초당의 초록빛 대숲은, 나에게 어쩔 수 없이,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와 은수가 첫 만남에서 소리를 따며 함께 쳐다보았던 대숲을 떠올리게 한다. 스스스- 서로 부대껴 소리를 내는 강원도의 겨울 대숲에서 상우와 은수의 설레임이 시작되었다면, 그보다 수천년은 더 자라고 테가 굵어졌을 두보초당의 봄날 대숲은 동하와 메이(메이의 중국어 이름도 우유에, 五月이다)의 사랑의 기억을 환기하며 새로운 설레임을 부른다. 그들이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은 “기억나?” 로 대표되는 과거들이다. 예전부터 너는 말이 많았느니, 너는 언제나 그랬다느니, 너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었다느니, 우린 사귀었고 키스도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그들이 함께했던, 그래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기억조차 아스라한 과거에 뿌리를 대고 있다.
허진호의 다른 연인들이 함께 현재를 만들어가는 데 주력하고, 혹은 불확실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행복해하거나 망설였던 것에 비해 이들의 시선은 과거를 향하고, 쉽사리 ‘현재’ 에 대한 가능성을 내밀지 못하는 수줍은 만남이다. 메이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하의 옆얼굴은, 이미 “정원아~” 를 부르는 유부남 역할의 CF를 찍어도 전혀 아쉽지 않을 나이의 아저씨 정우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소년의 표정을 그대로 그린다. 마치 두보초당에 파릇하게 내려앉은 봄기운처럼. 이들의 데이트 장면은 서로가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는 그 짜릿한 순간을 청신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영화는 두 사람의 연결과는 아무 상관없을 듯하나 가장 강력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매는 하나의 큰 사건을 그린다. 2008년 5월 12일에 있었던 원촨 대지진. 동하가 청두에 출장을 온 이유는, 그의 회사가 지진현장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하의 시선은 폐허가 된 건물 위에 놓여진 꽃, 찌그러진 자전거, 그리고 사람이 거기에 있었던 흔적을 무심한 듯 좇는다.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어딘가 그림자가 드리운 메이의 얼굴에서 원촨 대지진의 잔해를 읽어낼지 모른다. 결 국 그들의 현재에 가로막힌 장애물이 무엇이었는지를 동하가 알게 될 때, 나에게 메이의 아픔은 단지 메이 한 사람만의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무후사 뒤편의 금리 거리와 팬더공원에서 해맑게 웃는 청두 시민들 어느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아픔이 있을 것이며, 하루 아침에 불가항력적인 일들로 사랑을, 꿈을,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보편의 아픔과 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호우시절> 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착함과 순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는 것이 식물의 정점이라면, 그리고 그 뒤에는 사위어가는 것만이 남는다면 그간의 허진호의 영화는 사랑의 정점과 소멸을 씁쓸하게, 안타깝게 그려냈었다. 그러나 <호우시절> 은 꽃이 피고 난 뒤에 그 꽃을 스산히 지게끔하는 가을비가 아닌, 꽃이 피기 전, 그 초록을 더하게 하고 꽃몽우리를 자라게 하는 봄비다.
몇 차례의 때를 아는 좋은 비가 지나간 후, 이들은 새로 꽃을 피울 것이다. 감독이 딱 거기까지만 보여준다고 해도 뭐 어떻겠는가. 굳이, 그들의 사랑이 가을과 겨울을 맞아 스러짐을 보고 싶지 않은, 이 빛나고 맑은 오월의 청두에서 말이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자전거 못 타는 사람” 일 거라면서 자기 자신을 웃어넘겼던 메이는, 마지막에 노란 자전거를 타고 그 초록의 대숲 사이를 달린다. 좋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조립해 주고, 밀어 주고, 가르쳐 주고 그렇게 메이는 아슬아슬 위태하게, 그러나 성공적으로 ‘다시’ 자전거를 탄다.
햇살 아래 웃는 그녀의 얼굴이 유독 해맑다. 시간이 지나가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이 있지만,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강하게 버텨 일어나고, 대숲에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새로이 자전거를 타고, 미뤄두었던 편지를 쓰며 현재라는 공간을 채워간다. 무너졌던 공간에도 이제 다시 사람들이 살아갈 집들이 지어져야 하고, 무너졌던 마음에도 새로운 사랑이 그렁거리며 들어찬다. 그렇게, 새살이 돋는다. 그렇게,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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