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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동대문운동장

혼자만의 잡담

by 곰탱이루인 2007. 10. 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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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운동장을 아십니까?

1925년 경성운동장이란 이름으로 설립돼 82년간 서울 시민과 동고동락한 동대문운동장이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1925년 당시 일제의 왕세자인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일제가 만들었는데 당시의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습니다.  당시 소설가인 심훈의 상록수에서도 묘사할 정도로 동대문운동장은 서울의 명물이었습니다. 총 면적 2만2700평, 총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15만5000원, 수용 인원 2만5800명. 당시로서는 동양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규모였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는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뀌었으며 당시 어지럽던 정치 상황으로 인해서 우익과 좌익 단체들이 번갈아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던 장소였습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45년 12월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임시정부 환국봉영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자 서울 시민 3만 여명이 몰려 '김구 선생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마지막인 장례식도 49년 7월  서울 운동장에서 치루어졌는데 찾아온 시민들로 인해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60년대 이후에는 스포츠 중심지로 자리잡았습니다. 59년에 서울시 새로 단장한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반공 궐기대회나 새마을운동 보고대회 같은 관제 집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동대문운동장은 명실상부한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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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上)은 동대문과 성곽이며 사진(下)는 야구장과 축구장모습입니다


지금 40대 중후반의 세대에서는 70년대의 고교 야구대회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프로화가 된 스포츠가 없었으며 주로 인기가 있었던 경기는 국가대표가 경기하는 축구나 야구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성인들이 벌이던 경기의 인기보다 더 높았던 것이 바로 고교 야구대회였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72년 황금사자기배의 결승전으로서 군산상고가 1-4로 뒤지다가 9회말에 역전하여 우승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당시는 경북고나 부산고, 광주일고, 광주고, 군산상고, 덕수상고, 선린상고 등 지역별로 많은 고교 야구팀이 있어서 대회가 있는 날이면 동대문운동장은 만원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84년 잠실운동장이 생기고 난 뒤 이름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꾸면서 동대문운동장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왠만한 경기는(고교 야구등 아마 경기 제외하고) 잠실운동장에서 벌어졌으며 최근에는 동대문 재개발로 인해서
추억속의 동대문 운동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동대문 운동장은 몇년 전에 청계천 재개발로 인해서 그 곳에 있던 노점상들이 갈 곳이 없자 서울시에서 동대문운동장(야구장이 아닌)에 노점상을 모아서 "풍물시장"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동대문 야구장과 현재 풍물시장으로 쓰여지는 운동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2층짜리 디자인과 관련된 건물이 지어진다고 하더군요. 문화재관리청의 한 심사위원은 오랜 역사와 기록을 가진 동대문운동장이 재개발보다는  관리, 보존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지만 경제적 논리가 앞선 현재 동대문 운동장은 사라질 것이 뻔합니다. 오래된 것을 없애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도 좋지만 관리, 보존되어야 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고교야구나 고교 축구등 아마에서 운동할 수 있는 대체 운동장을 설립하고자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섰지만 결국은 용두사미가 되었습니다. 대체 운동장을 설립하지도 못하고 계획을 세우는 행정기관이나 관련단체에서는 미래를 보는 눈이 없는 거 같습니다.

p.s  동대문 운동장은 초기인 경성운동장이던 시기에는 축구장만 있다가 나중에 야구장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진은 연합뉴스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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