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홍련>을,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고전인 <장화홍련전>에서 모티프를 따와 변조한 괴담일 것으로 착각한 이들이 많았다. 실로 그 이야기를 공포영화로 만들어낸다는 것 역시 썩 흥미로운 작업일 거라 여겼다. 계모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원혼이라는 스토리 컨셉트 자체가 호러스럽거니와, 보기 드문 우리의 공포 고전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을 때의 매력 또한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은, 실은 자매와 계모라는 캐릭터 설정 외에는 특별히 그 고전과 연관성이 없었고, 도리어 그 원작을 심하게 훼손하면서 공포의 근원을 찾아낸 작품이었다.
게다가 <장화, 홍련>은 우리나라 공포영화가 번번이 저질러온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억지에서 비롯된 실수를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불편은 겪었으되, 이전까지 볼 수 없던(이후에도 보기 힘든) 훌륭한 반전을 선사할 수 있었다. 임수정 문근영 자매의 비밀, 그 자매와 염정아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 관객들은 패닉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충실히 다져둔 스릴과 서스펜스도 만족스럽게 표현했다.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관절 꺾는 귀신’이라는 다소 일본적인 표현도 있었으나 그 사용처가 몹시도 적절했고 또한 남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모범 사례라 하겠다. 이 영화는 또 ‘공포미술이란 이런 것’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마다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만한 디자인과 조명으로 한껏 공포감을 높여준 좋은 케이스를 선보였다. 이후 많은 공포 스릴러들이 그 디테일을 차용하는 것도 이 영화의 장르적 가치를 입증하는 대목이다.
영화 초반, 승용차에서 임수정 문근영 자매가 내리는 순간, ‘아, 저들 중 누가 귀신일까’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해본 이는 아마 거의 없으리라 여긴다. 자매가 아빠와 지내고, 또 서울에서 내려온 새엄마 염정아와 조우하고 갈등하며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같은 생각이었다. 도리어 관객들 대부분은 표독스럽고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다니는 새엄마를 너무도 쉽게 의심했다. ‘저 여자가 애들을 죽일 거야.’ 그렇게 아이들이 괴롭힘당하고, 아빠도 못 믿겠고, 그러는 동안 관객들의 피도 조금씩 말라갔다. <장화, 홍련>을 아직도 정말 잘 만든 공포영화라 확신하는 것은 이렇게 ‘절묘한 속임수’가 밑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모든 관객이 공포를 조장하는 새엄마에게 짙은 혐의를 둘 때, 영화는 보기 좋게 관객들을 배신하며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결국 자매는 둘이 아닌 하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혼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 마지막 장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감독 박기영 | 주연 이미연 김규리 최강희 | 서울관객 수 62만 1,032명 | 1998
아무도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은 <여고괴담>은 1998년 여름에 개봉해 전국 200만 명 정도의 관객을 모으며 대성공을 거둔 영화다. 흥행 성공도 성공이지만 영화사적으로 볼 때 <여고괴담>은 두 가지로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한국 공포영화의 부활을 알렸다는 점이다. 물론 <여고괴담>이 있기 전에 김성홍 감독이 <손톱> <올가미> 등의 공포·스릴러영화를 꾸준히 연출하며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스크림>이 죽어 있던 공포영화 장르를 부활시켰듯, <여고괴담>은 한국영화에 공포영화 장르도 흥행할 수 있다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것도 여고생들이 출연하는 공포영화가 관객들에게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멀티플렉스가 없던 시절 전국 관객 200만 명 가까운 성적을 올렸으니 대단한 성공이었다. 5월 말에 개봉한 이 영화는 방학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학생 관객의 지지를 얻어 승승장구했다.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박기영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력, 그리고 이미연을 제외하고는 신인급인 젊은 연기자들이 힘을 모아 공포영화의 힘을 보여줬다. <여고괴담>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 브랜드의 공포영화 시리즈물이 생겼다는 점이다. <여고괴담>은 4편까지 각기다른 구성과 장르로 이어지며 청소년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특히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공포영화를 바탕으로 여고생들 간의 우정과 사랑을 밀도 있게 그려내 청소년영화로서 인정받기도 했다. <여고괴담> 시리즈는 젊은 여배우들을 충무로에 수혈해주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김규리 박진희 최강희 김민선 박예진 송지효 박한별 조안 차예련 김옥빈 서지혜 등이 그들이다.
외국 공포영화에 우물에서 브라운관으로 나오는 <링>의 그 장면이 있다면, 한국 공포영화엔 바로 <여고괴담>의 복도 “탕 탕 탕” 장면을 꼽겠다. 무속인의 딸이었기에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고, 그를 이기지 못해 자살한 9년 전 진주(최강희)는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3년마다 졸업사진에 등장한다. 그리고 당시 같은 반 친구인 은영(이미연)이 부임해 오자 학생과 선생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결국 귀신인 진주가 다른 이름으로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졸업 사진을 통해 안 은영에게 진주가 찾아온다. 무서움에 도망치는 은영. 어둠이 깔린 학교 복도 저편에 서늘하게 서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으스스하게 은영을 보고 있던 진주가 순간 “탕 탕 탕” 하는 사운드와 함께 순식간에 은영의 얼굴 앞으로 다가온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에게 진주가 다가오는 착각을 일으키는데, 그 이유는 진주의 모습이 롱 쇼트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순식간에 이동하기 때문이다.
감독 안병기|주연 하지원 김유미 주은우|서울관객 수 75만 5,437명|2002
<폰>은 가장 트렌디한 아이템을 소재로 삼아 가장 전통적인 괴담을 펼치는 요상한 영화다. 이야기의 모티프도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지만, 영화 속 모든 공포 코드들은 익숙하다 못해 친숙하다. 과도한 파란색 조명, 항상 비가 내리는 날씨, 6과 4로 조합된 전화번호 등 한국 전통 공포 장치들이 쉴 틈 없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전통’을 이렇게 열심히 섞어낸 경우도 드물다. 2000년 모든 공포영화들이 <스크림>의 방법론을 쫓아 10대들을 죽일 때, 안병기 감독의 <가위>만 그 길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그리고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 <링> 이후에 나온 그의 두 번째 영화 <폰>도 마찬가지다. 관절 꺾는 ‘사다코 귀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키를 훌쩍 넘어버린 지극히 한국적인 귀신이 노려볼 뿐이다. 게다가 모성애와 뒤섞인 여자의 한은 어떤 어설픈 설정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게 할 만큼 센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전통을 단순 복제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폰>은 <월하의 공동묘지> <여곡성> 등의 마인드를 이어받는 동시에 <엑소시스트>와 <오멘>의 오컬트 코드를 수용한다. 악마 대신 원한 서린 영혼이 아이에게 ‘빙의’하면서 영화의 전개는 더욱 복잡해지고 으스스해진다. 아이의 생물학적 엄마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는 이야기를 두텁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자인 그녀의 직업 때문에 추리극다운 서스펜스도 생겨난다. 중산층의 허위의식 및 원조교제, 스토커 등 휴대폰 사용으로 급증한 범죄를 건드리는 비판정신도 살짝 엿보인다. 이 모든 것이 섞여 있기 때문에 <폰>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익숙한 공포 코드지만 끝까지 마음 졸이며 볼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폰> 개봉 당시 가장 화제가 된 건 영주 역을 맡은 아역 배우 주은우의 연기력이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사랑에 빠진 독한 10대를 동시에 소화해 낸 이 아이는 한동안 ‘천재’라 불렸다. 계단 위에서 두 여자를 바라보며 저주를 퍼붓는 이 장면은 주은우의 연기가 폭발하는 지점이다. 마치 주문처럼 “역겨워!” 등의 욕설을 내뱉을 때, 닫힌 유리문 사이로 초조해 하는 지원(하지원)과 호정(김유미)이 교차 편집된다. ‘두 엄마’라는 모순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모성애와 빙의를 오가는 영화의 폭넓은 모티프를 잘 표현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논쟁적 이슈라 할 수 있는 월남전을 과감하게 소재로 택한 <알포인트>는 장점이 많은 영화다. 먼저 국내 최초로 시도된 전쟁 공포물이라는 점에서 장르적으로 신선함이 엿보인다. 영화는 월남전을 배경으로 실종된 전우를 찾아 나선 병사들이 ‘알포인트’라는 지역에서 겪는 공포를 다뤘다. ‘알포인트’는 실제 1972년에 실종된 월남파병 부대원들로부터 구조요청 무전이 걸려왔다는 장소인 로미오 포인트를 일컫는 말이다. 감우성은 200여 명의 부대원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최 중위로 등장, 부대장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알포인트'로 향한다. 그런데 도착하자 부대원들이 하나 둘 원혼과 맞닥뜨리면서 전쟁의 원혼이 서린 그곳에서 미치거나 비참하게 살해된다. 영화는 병사들을 베트남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라기보다는 그저 전쟁에 휘말린 ‘제3국’의 평범한 사람들로 묘사하기에 관객은 그들의 죽음을 보며 짜릿한 쾌감보다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알포인트>가 흥미로운 것은 공포물인데도 불구, 전쟁이 남긴 공황과 슬픔에도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반전영화를 목표로 했다는 공수창 감독의 의도만큼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알포인트>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마초이즘’에서 공포가 출발한다는 점에 있다. 군인들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남성관객들은 여성관객들이 느끼지 못하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군대문화 특유의 비속어 입씨름과 “쪼개면(웃으면) 죽는다”는 식의 강압적인 복종관계는 영화 속에서 재현된다.
죽은 대원들을 괴롭게 쳐다보던 최 중위, 저택의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기묘하게 생긴, 서글픈 울림을 내는 악기로 보이는 물건. 집어 드는 순간 하얀 옷을 입은 처녀의 혼령이 나타난다. “총 들어!” 최 중위는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 살아남은, 눈이 먼 막내병사에게 귀신을 향해 쏘라고 악을 쓴다. 그 모습에 혼령은 우습다는 듯이 미소 짓는다.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공포 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악에 받친 듯 혼령의 눈은 시뻘건 피로 물들고, 최 중위와 막내병사는 서로 무기를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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